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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의 상징 테이블 마운틴과 신호산
테이블산 - 케이프타운 어디서나 잘 보인다
숙소에 짐을 풀자 마자 거리로 나선다. 유럽풍의 거리가 관광객을 반긴다. 뭐니 뭐니 해도 케이프타운의 상징은 테이블 마운틴이다. 우리가 아는 산은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이어지면서 여기저기가 솟은 모습일 텐데, 테이블 마운틴은 줄기를 잘라낸 그루터기처럼 정상이 평평하다. 도시 뒤로 높고 긴 탁자를 올려놓은 듯 신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럼 케이프타운에 대해 알아보자.
케이프타운은 지형적 특징에서 유래된 곶의도시(Cape Town)이다. 대서양과 인도양의 경계가 되는 케이프반도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남아프리카 최대의 무역항이다. 면적은 400 ㎢ 인구는 47만명이다. 포르투갈 해양왕자 엔리케가 단행한 신항로 개척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바르돌로 뮤 디아스의 항해는 1488년 케이프타운반도의 남쪽인 '폭풍우의 곶' 즉 지금의 희망봉 도착이라는 성과를 얻는다. 이어 1497년 역시 포르투갈 항해가인 바스코 다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해안과 아라비아해를 지나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다. 이로써 드디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인도항로'가 개척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대항해시대가 열린다.
사실 바스코 다가마 뿐 아니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게 된 이유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서라는 것은 다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럼 왜 기를 쓰고 인도를 가려했을까? 그것은 향신료 때문이다. 15,6세기 향신료의 가치는 말 그대로 금값이다. 후추는 같은 무게의 금과 교환되었고, 넛맥이라고 불리는 육두구 500g은 여자노예 3명 혹은 소 7마리와 교환되어 금보다도 훨씬 비쌌다. 문제는 이 동방과의 향신료 무역을 베네치아 공화국이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항로를 통해 인도로 가려는 시도가 줄을 잇는다. 결국 이 노력은 바스코 다가마에 의해 결실을 맺게 된다. 멀리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한 바스코 다가마는 가지고 간 모든 것들을 향신료로 바꾸어 배에 싣는다. 그리도 다시 희망봉을 돌아 도착했을 때, 그는 들어간 총비용의 600 배를 이익으로 남긴다. 이후 모든 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바다로 바다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워터프론트 항구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케이프타운은 동양과 서양의 접점이 되어 인도와 동남아시아, 동아시아로 항해하는 선박의 중요한 기항지가 되었다.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보급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이곳에 상관을 설치하고 항만시설을 구축했다. 남아공의 파란만장한 백인 식민 지배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케이프타운을 건설한 것은 노예들이었다. 기지 건설이 시작되고 1800년대 초까지 케이프타운에 끌려온 노예의 수는 63,000명에 이른다. 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지아, 인도 실론(스리랑카) 등에서 데려왔고, 잔지바르와 마다가스카르, 앙골라, 모잠비크에서도 끌고 왔다.
여느 유럽도시처럼 해안을 따라 공원이 많이 만들어져 있다.
케이프타운은 잘 알려지지 않은 4개의 별칭을 따로 갖고 있다.
첫번재는 어머니의 도시(Mother City)이다. 1652년 네덜란드가 이곳에 공급기지인 상관을 개설한 이후 네덜란드인을 비롯한 영국인, 프랑스인, 코르투갈인, 독일인 등 유럽 백인들이 몰려와 이곳을 기착지로 하여 요하네스버그와 프리토리아 등의 아프리카 내지로 이동했다. 즉 이곳이 아프리카 백인들을 내지로 공급하는 '어머니' 역할을 한다며 그렇게 부른 것이다.
두 번째는 바람의 도시(Wind City)라는 별칭이다. 1488년 바르돌로 뮤 디아스가 3척의 범선을 이끌고 이곳까지 심한 폭풍에 시달린 끝에 도착하였고 '폭풍우의 곶'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 후 배들이 이곳을 지나갈 때마다 늘 강풍이나 폭풍우가 불고 있어 '바람의 도시'라고 불렸다.
세 번째는 케이프닥터(Cape Doctor 의사의 곶)이라는 별칭이다. 늘 바람이 불어와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듯이 오염된 공기를 맑게 해 준다고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프리카답지 않은 아프리카 도시'라는 별칭이 있다. 16세기 네덜란드인들이 처음으로 이곳에 왔을 때 지금의 흑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원주민들도 거의 멸종된 상태였다고 한다. 이렇게 공백의 땅에 유럽의 백인들이 들어와 완전히 새로운 유럽식 도시를 만들어 냈으니 이는 아프리카의 도시가 아니라 유럽의 도시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자 식민사관에 근거한 괴변이다. 이곳에는 10만 년 전부터 현생 인류가 살고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농사를 지었던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워터프론트에서 저녁식사
V&A Waterfront로 이동한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도보로 갈 수 있다. V&A Waterfront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 알프레드 왕자의 방문을 기념해서 만든 곳이다. 원래 항구만 있던 곳을 개발해 쇼핑, 식당, 숙박, 공연이 있는 복합문화시설로 재탄생시켰다.
워터 프런트를 거닐다가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다. 분위기 좋은 식당에 들어가 이것저것 주문한다. 식사를 하며 주위 식당의 둘러보다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워터프런트는 남아공 최대의 항구이자 케이프타운의 핫플레이스다. 관광객들 만큼이나 상점과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도 많다. 그런데 현지에서 일을 하는 종업원 대부분 흑인들이고, 서비스를 받으며 식사를 하는 사람 대부분 백인과 소수의 동양인이다. 남아공 인구 구성은 흑인 80.2%, 백인은 8.4% 이고 나머지는 아시아계와 유색인종이다. 따라서 어디를 가든 흑인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여기 워터프론트 식당에서 비싼 음식값을 내고 식사를 하는 사람 대부분은 백인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과 비교해서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 흑백 간 극심한 빈부격차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진다.....
다음날, 케이프타운에 가면 반드시 가보리라고 다짐했던 로벤섬을 가려고 워터프런트를 다시 찾는다. 그런데 겨울에는 배가 운행을 안 한다고 한다. 이런...... 로벤섬은 케이프타운에서 12km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에 있는 섬이다. 이곳은 넬슨만델라를 비롯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탄압받던 수많은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던 교도소였다. 알제리 혁명가 프란츠 파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주받은 땅 아프리카에서 저주받은 자들'의 유배지인 것이다. 로벤섬은 아파르트헤이트 전에도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흑인 추장들을 가두는 장소였다. 그러다가 1959 - 82에는 주로 만델라를 비롯한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한 지도자들을 감금하는 정치범 감옥으로 변했다. 1996년 이 정치범 감옥이 폐쇄된 이래 로벤섬은 이제 자유의 기념관으로 바뀌었다. 1999년에는 섬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여기서 다시 넬슨만델라의 인생과 업적을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에 흑인이 압도적 다수이며 백인과 혼혈인, 아시아인뿐 아니라 공용어만 11개일 정도로 많은 부족이 어울려사는 남아공의 미래는 공존 속에 화합을 추구하는 '무지개의 나라'가 마땅할 것이다. 남아공의 국가 기호도 '무지개의 나라'와 잘 어울리는 '다양성 속의 통일'이다. 민주화 이후 새로 채택된 남아공 국기도 6가지 색을 사용하고, 여러 색이 조화롭게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여 무지개 국기'라고 부른다.
이제 아파르트헤이트 상처를 넘어 다양한 인종이 무지개 색으로 어울려 평화롭게 공존하는 남아공의 미래를 기원해 본다.
보캅마을 형형색색의 칠을 한 무슬림촌이다
산 중턱에 있는 보갑마을로 향한다. 여기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인도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기타 아프리카 지역에서 끌고 온 온 무슬림 노예들의 후예가 이곳에 모여 살면서 이루어 놓은 일종의 집성촌이다. 건물을 여러 가지 원색으로 단장한 것이 특징이다. 이곳은 빨갛고 파랗고 노란색의 집들이 어우러진 원색의 집합체였다. 이런 원색의 강렬함이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원색의 집합체로 이룬 이슬람 공동체
거리에는 할랄(Halal), 즉 '허용'이라는 알림판이 붙어 있는 식당들이 많이 보인다. 여기서 '허용'이란 이슬람 율법에 의해 허용되는 식품을 말한다. 이러한 허용되는 식품의 반대말은 '하람'(Haram)이라고 한다. 돼지고기, 술, 비이슬람식을 도살된 고기 등을 먹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슬람의 금기가 무척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면 생각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아공은 다종교 국가이다. 기독교 신자가 79.8%로 절대다수이며 다음으로 이슬람교 1.5%, 힌두가 1,2%이며 그 외 기타 유대교 토착신앙 등 다양한 종교가 공준하고 있다.
시내를 한 바퀴 도는 코스로 롱스트리트 - 케이블카 정류장 - 커스텐 보쉬식불원 - 스텔렌보스 와이너리 - 후트베이 - 샌드베이 - 켐스베이 - 롱스트리트 를 한바퀴 도는 코스이다. 우리 식으로 보면 테이블산 둘레길 순환버스 정도 될 듯하다^^ 겨울이라 테이블산 케이블카 운행이 정지되어 있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식물원 왼쪽으로 넓은 포도밭이 보인다.
버스가 첫 번째 기착지에 도착한다. 커스텐 보쉬 식물원이다. 살짝 오르막을 오르며 식물원으로 가다 보니 왼편에 와이너리가 보인다.
와이너리 본관
어! 여기도 와인너리네..... 갑자기 걸음이 왼쪽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병훈과 둘이 와이너리를 향해 걸다가 병훈에게 한마디 한다.
필자 : 식물원 안 가?
병훈 : 거기는 이따가 가면 되지.
필자 : 시간이 안 되면?
병훈 : 그럼 안 가면 되지. 우리가 식물원 안 가봤어?
필자 : 그렇지! 우리가 식물원은 몇 번 가봤지^^
그런데 너 와인 안 좋아하잖아?
병훈 : 에이 왜 그래. 한국에서 안 먹었지만 여기서는 쪼금씩 먹고 있잖아....
와인 안 좋아한다던 병훈은 탄자니아에서부터 매일 1병씩 먹고 있는 중이다^^
와인 종류가 너무 많아서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와이너리 입구에서 티켓을 보여달라고 한다. 확인한 마담은 우리 티켓은 와이너리 체험 미포함이라고 알려준다. 얼마인지 확인해 보니 그리 싸지는 않았다. 300 랜드이니 25$ 정도 될 듯하다. 살짝 고민하는 사이 병훈은 벌써 와인 진열장 앞에 가 있다^^
오크통들
비용을 지불하고 입장을 한다. 몇 군데 돌아다니며 이곳 와이너리의 역사와 특징을 설명해 준다. 간단히 요약해 보자
1697년 케이프타운에 이어 두 번째로 건설된 도시 스텔렌보스는 비옥한 농경지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그 주변에 팔과 프랑쉬후크, 서머셋웨스트, 웨링턴 지역을 통틀어 와인랜드라고 한다. 1688년 프랑스에서 쫓겨난 위그노파 신교도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유럽과는 다른 비옥한 땅과 커다란 일교차는 유럽과는 다른 남아공만의 와인을 생산하는 비결이 되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는 높은 명성을 지니고 해외에도 수출된다. 남아공 인근의 남아프리카 나라들의 소비되는 와인 대부분은 여기에서 생산된 것들이다.
안주는 초코렛
긴 설명을 간단히^^ 듣고 이제 와인을 시음할 차례이다. 이것저것 시음 중 독특한 것을 발견한다. 안주로 치즈나 스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초콜릿을 주고 있다. '어! 이것도 안주가 되나..... 그런데 초콜릿은 생각보다 와인과 잘 어울리는 안주였다. 문득 대학 다닐 때 초콜릿에 소주를 먹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생각보다 소주와 잘 어울려 깜짝 놀랐었다^^
후트베이(Hout Bay)
한참을 와이너리에서 놀고 다시 투어 버스를 탄다. 벌건 대낮에 와인을 여러 잔 마셨으니 취기가 오른다. 술은 낮술이라고 했나..... 한 것 오른 취기에 병훈과 눈치 없이 낄낄대며 떠들다 보니 후트베이(Hout Bay)에 도착한다. 후트베이는 예전에 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후트는 네덜란드어로 나무라는 뜻이다. 걷다 보니 해산물 식당이 많이 보여, 점심을 먹기로 한다.
기름 투성이 튀김
사람은 많고 가격도 적당해 보였으나 결론은 실패다. 튀김에 기름이 너무 많았다. 튀김 기름을 언제 교체했는지도 모르겠고, 같이 시킨 맥주 아니었으며 안 먹고 그냥 나올 뻔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오다가 깜짝 놀란다.
물개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커다란 물개 한 마리가 바다에서 어슬렁거리며 도로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보니 처음도 아닌 듯 사람들 옆으로 다니며 친한 척을 한다. 먹이를 달라는 신호인 듯한데, 먹이를 주지 않자 데굴데굴 굴러 다닌다. 그럼 이 녀석은 노숙자 물개인가^^ 잘 얻어먹어서 그런지 몸집도 엄청나게 크다. 물어보니 후트베이 앞바다 섬에 물개들이 산다고 한다. 그런데 딱 몇 녀석은 이렇게 수시로 항구로 올라와 지나가는 사람들 삥을 뜯는다고 한다ㅎㅎ
채프먼스 피키 드라이브 코스
후트베이를 지나 언덕을 넘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풍광이 열리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세계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라는 채프먼스 피크 드라이브 해안도로를 달린다. 해안선을 절벽을 따라 둥글게 돌아가나는 아찔한 체험과, 옆에서 바위를 깎아 들어간 반터널식 도로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준다.
캠프스베이 해변뒤로 보이는 12사도 봉우리
캠프스베이 하얀 모래뒤로 여러 개의 봉우리가 보인다. 높은 바위산 12개가 있는데, 예수의 열두 제자에 빗대어 12 사도 봉우리라고 부른다. 어떤 제자는 얼굴이 뽀족하고, 다른 제자는 둥글고,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며 하나 둘씩 하얀색 카페에 불이 들어 오며 푸른 하늘과 만나자, 12사도 봉우리는 액자 속으로 들어간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희망봉을 가기위해 해안도로를 달린다
다음날 희망봉을 가려고 차를 렌트한다. 차를 빌려 처음 운전대를 잡으며 살짝 긴장한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에 운전석이 있는 차는 거의 이십 년 만에 운전하는 것 같다. 앉아 있는 위치도 어색하고 방향 지시등을 켜면 위도우 브러시가 움직인다^^ 조금씩 적응하며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희망봉!
이름 만들어도 설레는 말이다. 어린 시절 지도 보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볼 때마다 거기 가면 모든 희망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세계여행가 김찬삼 교수의 희망봉 사진을 보면서 꼭 가고 싶었다. 김찬삼 교수가 그 엄혹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자신은 피부가 하얘서 백인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갈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 희망봉을 지금 가고 있는 것이다.
희망봉 자연보호구
희망봉 자연보호구를 거쳐 희망봉으로 향한다. 희망봉 보호구(Cape of Good Hof Nature Reserve)는 케이프 반도 남단 시몬스타운과 희망봉사이에 자리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구의 하나이다. 이 보호구는 서쪽부터 희망봉곶, 매틀리어 곶(Cape Maclear), 포인트곶의 3대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희망봉 자연보호구에는 진귀한 동식물이 많이 서식하는데, 그중 적잖은 동식물은 원시적 진화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생태 연구의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1836년 다윈도 이곳에 와서 식물자원과 종의 기원 및 진화과정을 연구한 바 있다.
그리고 보호구의 해변가에는 포르투갈 항해가 바르돌로 뮤 디아스의 기념비와 인도항로의 개척자인 포루투갈 항해가 바스코 다가마의 기념비가 서 있다.
바르돌로뮤 디아스는 포르투갈 엔리케 탐험대에 소속된 범선 3척을 이끌고 1488년 이곳에 도착한다. 그는 늘 바람이 세고 파도가 높게 일어나는 이곳을 폭풍우의 곶이라고 명명했다. 그의 보고를 들은 국왕 주앙 3세는 앞으로 자주 오갈 이름치고는 흉하다며, 희망을 줄 뿐 아니라 듣기에도 좋은 '희망봉'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라고 명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관용되고 있다. 디아스는 1500년 다시 한번 희망봉까지 항해에 나섰다가 폭풍우를 만나 목숨을 잃고 만다.
희망봉
희망봉은 영어로는 Cape of Good Hope로 직역하면 아름다운 희망의 곶이라는 뜻이다. 지리적 위치는 동경 18도 25분 26초, 남위 34도 21분 25초이며, 케이프 타운 남방 5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희망봉은 대서양과 인도양의 접하지로서,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기 전 300년 동안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유일한 해상통로였다. 수에즈운하 개통 이후 항로로서의 역할이 조금 약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25만 톤급 이상의 유조선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어 이곳을 지나야 만 한다. 해마다 3 - 4만 척의 대형선박이 희망봉을 거쳐간다. 유럽 수입원유의 30% , 전략물자의 70%, 식량의 25%가 이곳을 지나간다.
희망봉은 두바다가 만나는 지점으로 바람과 파도가 거세다
이곳은 폭풍우가 잦고 파도가 높아 발견 당시 폭풍우의 곶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살인적인 파도가 친다. 이 파도는 온화한 해류와 한냉 한 남극 해류가 이곳에서 맞부딪치기 때문이다. 늘 사나운 바람이 불고 높은 파도가 치며 심지어 파고가 30m에 이를 때도 있다.
1860년 설치한 등대
희망봉 위쪽 언덕 케이프포인트(Cape Point) 정상에는 1860년 설치한 등대가 관광객을 맞이한다. 정말 더 이상 갈 수 없는 땅끝이다. 포르투갈 국민시인 카몽이스(Luis Vaz de Camoes 1524 - 1580)는 포르투갈 서쪽 끝 카보 다 로카(로카 곶)에서 '여기 땅이 끝나는 곳에 바다가 시작된다'라고 외쳤다. 인도로 가기 위해 희망봉으로 출항하는 포르투갈 탐험선에 바쳤던 카몽이스의 헌시는, 희망봉에 대한 헌시이기도 했다.
서울 방향 표지판이 안 보인다. 다음에는 볼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전망대에는 남극 6248kn, 뉴욕 12541km, 런던 9623, 뉴델리 9296km 등 전세게 주요 도시가 표시된 방향과 표지를 배경으로 여행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아쉬게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도시 서울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희망봉에는 아직 한류가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다음에는 서울 표지판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여기는 희망봉이니까^^
아래 쪽 디아스포인트에 새등대를 만들었다.
희망봉 등대로 알려진 이곳은 지금은 등대역할을 하지 않는 퇴역등대이다. 아래쪽 바다에 더 가까운 곳 디아스포인트(Dias Point 해발 87m)에 1919년 새로 설치된 등대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등대가 자주 구름과 안개에 가리는 문제'가 있어 새로운 등대를 설치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희망곶에서 바라본 등대
희망봉은 특정지점이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케이프 반도 전체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이 희망봉은 우리 역사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904년 러일전쟁의 승패를 갈라 놓은 것이 바로 희망봉이다. 러일전쟁이 터지자 북유럽에 발트해에 있던 러시아 최정예 발트함대는 영국의 방해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무려 7개월이나 걸려 희망봉을 돌아 대한 해협에 도착한다. 그 사이 뤼순은 일본에 함락되었고 긴 항해로 지칠 대로 지친 발트함대는 동해에서 일본해군에 궤멸적 타격을 입게 된다. 이 전쟁의 결과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고, 러시아는 1905년 1차 혁명에 이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차르체제가 무너지게 된다.
케이프 반도 전경
희망봉은 영화 (캐러비안 해적 2 - 망자의 함)의 무대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해적들은 '플라잉 더치맨이다'라는 외침에 혼비백산한다. 바다의 무법자 해적들도 들려워했던 플라잉 더치맨. 인도양으로 항해하던 선원들이 희망봉을 돌아가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플라잉 더치맨이다. 플라잉 더치맨(Flying Dutchman)이란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 또는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이라는 뜻으로 유령선의 대명사이다. 플라잉 더치맨 전설의 무대가 바로 희망봉이다. 불쌍한 플라잉 더치맨이 희망봉 앞바다에서 영원히 헤매야 하는 것은, 코이코이산 원주민을 내쫓고 아프리카 땅을 식민지로 만든 원죄 때문이다.
처음 희망봉을 발견한 디아스가 1500년 다시 항해에 나섰다가 폭풍우로 죽은 곳도 이곳 희망봉 앞바다이고, 1641년 동인도에서 네덜란드로 돌아가던 반 데르 테켄 선장 (프랑잉 더치맨의 주인공)의 배가 폭풍우를 만나 침몰한 것도 희망봉이다. 그래선지 희망봉은 카몸이스부터 허먼 멜빌에 이르기 까지 시대를 뛰어넘어 전설과 문학의 소재가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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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짐을 풀자 마자 거리로 나선다. 유럽풍의 거리가 관광객을 반긴다. 뭐니 뭐니 해도 케이프타운의 상징은 테이블 마운틴이다. 우리가 아는 산은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이어지면서 여기저기가 솟은 모습일 텐데, 테이블 마운틴은 줄기를 잘라낸 그루터기처럼 정상이 평평하다. 도시 뒤로 높고 긴 탁자를 올려놓은 듯 신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럼 케이프타운에 대해 알아보자.
케이프타운은 지형적 특징에서 유래된 곶의도시(Cape Town)이다. 대서양과 인도양의 경계가 되는 케이프반도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남아프리카 최대의 무역항이다. 면적은 400 ㎢ 인구는 47만명이다. 포르투갈 해양왕자 엔리케가 단행한 신항로 개척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바르돌로 뮤 디아스의 항해는 1488년 케이프타운반도의 남쪽인 '폭풍우의 곶' 즉 지금의 희망봉 도착이라는 성과를 얻는다. 이어 1497년 역시 포르투갈 항해가인 바스코 다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해안과 아라비아해를 지나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다. 이로써 드디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인도항로'가 개척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대항해시대가 열린다.
사실 바스코 다가마 뿐 아니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게 된 이유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서라는 것은 다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럼 왜 기를 쓰고 인도를 가려했을까? 그것은 향신료 때문이다. 15,6세기 향신료의 가치는 말 그대로 금값이다. 후추는 같은 무게의 금과 교환되었고, 넛맥이라고 불리는 육두구 500g은 여자노예 3명 혹은 소 7마리와 교환되어 금보다도 훨씬 비쌌다. 문제는 이 동방과의 향신료 무역을 베네치아 공화국이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항로를 통해 인도로 가려는 시도가 줄을 잇는다. 결국 이 노력은 바스코 다가마에 의해 결실을 맺게 된다. 멀리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한 바스코 다가마는 가지고 간 모든 것들을 향신료로 바꾸어 배에 싣는다. 그리도 다시 희망봉을 돌아 도착했을 때, 그는 들어간 총비용의 600 배를 이익으로 남긴다. 이후 모든 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바다로 바다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케이프타운은 동양과 서양의 접점이 되어 인도와 동남아시아, 동아시아로 항해하는 선박의 중요한 기항지가 되었다.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보급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이곳에 상관을 설치하고 항만시설을 구축했다. 남아공의 파란만장한 백인 식민 지배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케이프타운을 건설한 것은 노예들이었다. 기지 건설이 시작되고 1800년대 초까지 케이프타운에 끌려온 노예의 수는 63,000명에 이른다. 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지아, 인도 실론(스리랑카) 등에서 데려왔고, 잔지바르와 마다가스카르, 앙골라, 모잠비크에서도 끌고 왔다.
케이프타운은 잘 알려지지 않은 4개의 별칭을 따로 갖고 있다.
첫번재는 어머니의 도시(Mother City)이다. 1652년 네덜란드가 이곳에 공급기지인 상관을 개설한 이후 네덜란드인을 비롯한 영국인, 프랑스인, 코르투갈인, 독일인 등 유럽 백인들이 몰려와 이곳을 기착지로 하여 요하네스버그와 프리토리아 등의 아프리카 내지로 이동했다. 즉 이곳이 아프리카 백인들을 내지로 공급하는 '어머니' 역할을 한다며 그렇게 부른 것이다.
두 번째는 바람의 도시(Wind City)라는 별칭이다. 1488년 바르돌로 뮤 디아스가 3척의 범선을 이끌고 이곳까지 심한 폭풍에 시달린 끝에 도착하였고 '폭풍우의 곶'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 후 배들이 이곳을 지나갈 때마다 늘 강풍이나 폭풍우가 불고 있어 '바람의 도시'라고 불렸다.
세 번째는 케이프닥터(Cape Doctor 의사의 곶)이라는 별칭이다. 늘 바람이 불어와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듯이 오염된 공기를 맑게 해 준다고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프리카답지 않은 아프리카 도시'라는 별칭이 있다. 16세기 네덜란드인들이 처음으로 이곳에 왔을 때 지금의 흑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원주민들도 거의 멸종된 상태였다고 한다. 이렇게 공백의 땅에 유럽의 백인들이 들어와 완전히 새로운 유럽식 도시를 만들어 냈으니 이는 아프리카의 도시가 아니라 유럽의 도시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자 식민사관에 근거한 괴변이다. 이곳에는 10만 년 전부터 현생 인류가 살고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농사를 지었던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V&A Waterfront로 이동한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도보로 갈 수 있다. V&A Waterfront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 알프레드 왕자의 방문을 기념해서 만든 곳이다. 원래 항구만 있던 곳을 개발해 쇼핑, 식당, 숙박, 공연이 있는 복합문화시설로 재탄생시켰다.
워터 프런트를 거닐다가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다. 분위기 좋은 식당에 들어가 이것저것 주문한다. 식사를 하며 주위 식당의 둘러보다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워터프런트는 남아공 최대의 항구이자 케이프타운의 핫플레이스다. 관광객들 만큼이나 상점과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도 많다. 그런데 현지에서 일을 하는 종업원 대부분 흑인들이고, 서비스를 받으며 식사를 하는 사람 대부분 백인과 소수의 동양인이다. 남아공 인구 구성은 흑인 80.2%, 백인은 8.4% 이고 나머지는 아시아계와 유색인종이다. 따라서 어디를 가든 흑인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여기 워터프론트 식당에서 비싼 음식값을 내고 식사를 하는 사람 대부분은 백인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과 비교해서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 흑백 간 극심한 빈부격차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진다.....
다음날, 케이프타운에 가면 반드시 가보리라고 다짐했던 로벤섬을 가려고 워터프런트를 다시 찾는다. 그런데 겨울에는 배가 운행을 안 한다고 한다. 이런...... 로벤섬은 케이프타운에서 12km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에 있는 섬이다. 이곳은 넬슨만델라를 비롯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탄압받던 수많은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던 교도소였다. 알제리 혁명가 프란츠 파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주받은 땅 아프리카에서 저주받은 자들'의 유배지인 것이다. 로벤섬은 아파르트헤이트 전에도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흑인 추장들을 가두는 장소였다. 그러다가 1959 - 82에는 주로 만델라를 비롯한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한 지도자들을 감금하는 정치범 감옥으로 변했다. 1996년 이 정치범 감옥이 폐쇄된 이래 로벤섬은 이제 자유의 기념관으로 바뀌었다. 1999년에는 섬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여기서 다시 넬슨만델라의 인생과 업적을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에 흑인이 압도적 다수이며 백인과 혼혈인, 아시아인뿐 아니라 공용어만 11개일 정도로 많은 부족이 어울려사는 남아공의 미래는 공존 속에 화합을 추구하는 '무지개의 나라'가 마땅할 것이다. 남아공의 국가 기호도 '무지개의 나라'와 잘 어울리는 '다양성 속의 통일'이다. 민주화 이후 새로 채택된 남아공 국기도 6가지 색을 사용하고, 여러 색이 조화롭게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여 무지개 국기'라고 부른다.
이제 아파르트헤이트 상처를 넘어 다양한 인종이 무지개 색으로 어울려 평화롭게 공존하는 남아공의 미래를 기원해 본다.
산 중턱에 있는 보갑마을로 향한다. 여기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인도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기타 아프리카 지역에서 끌고 온 온 무슬림 노예들의 후예가 이곳에 모여 살면서 이루어 놓은 일종의 집성촌이다. 건물을 여러 가지 원색으로 단장한 것이 특징이다. 이곳은 빨갛고 파랗고 노란색의 집들이 어우러진 원색의 집합체였다. 이런 원색의 강렬함이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거리에는 할랄(Halal), 즉 '허용'이라는 알림판이 붙어 있는 식당들이 많이 보인다. 여기서 '허용'이란 이슬람 율법에 의해 허용되는 식품을 말한다. 이러한 허용되는 식품의 반대말은 '하람'(Haram)이라고 한다. 돼지고기, 술, 비이슬람식을 도살된 고기 등을 먹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슬람의 금기가 무척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면 생각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아공은 다종교 국가이다. 기독교 신자가 79.8%로 절대다수이며 다음으로 이슬람교 1.5%, 힌두가 1,2%이며 그 외 기타 유대교 토착신앙 등 다양한 종교가 공준하고 있다.
시내를 한 바퀴 도는 코스로 롱스트리트 - 케이블카 정류장 - 커스텐 보쉬식불원 - 스텔렌보스 와이너리 - 후트베이 - 샌드베이 - 켐스베이 - 롱스트리트 를 한바퀴 도는 코스이다. 우리 식으로 보면 테이블산 둘레길 순환버스 정도 될 듯하다^^ 겨울이라 테이블산 케이블카 운행이 정지되어 있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버스가 첫 번째 기착지에 도착한다. 커스텐 보쉬 식물원이다. 살짝 오르막을 오르며 식물원으로 가다 보니 왼편에 와이너리가 보인다.
어! 여기도 와인너리네..... 갑자기 걸음이 왼쪽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병훈과 둘이 와이너리를 향해 걸다가 병훈에게 한마디 한다.
필자 : 식물원 안 가?
병훈 : 거기는 이따가 가면 되지.
필자 : 시간이 안 되면?
병훈 : 그럼 안 가면 되지. 우리가 식물원 안 가봤어?
필자 : 그렇지! 우리가 식물원은 몇 번 가봤지^^
그런데 너 와인 안 좋아하잖아?
병훈 : 에이 왜 그래. 한국에서 안 먹었지만 여기서는 쪼금씩 먹고 있잖아....
와인 안 좋아한다던 병훈은 탄자니아에서부터 매일 1병씩 먹고 있는 중이다^^
와이너리 입구에서 티켓을 보여달라고 한다. 확인한 마담은 우리 티켓은 와이너리 체험 미포함이라고 알려준다. 얼마인지 확인해 보니 그리 싸지는 않았다. 300 랜드이니 25$ 정도 될 듯하다. 살짝 고민하는 사이 병훈은 벌써 와인 진열장 앞에 가 있다^^
비용을 지불하고 입장을 한다. 몇 군데 돌아다니며 이곳 와이너리의 역사와 특징을 설명해 준다. 간단히 요약해 보자
1697년 케이프타운에 이어 두 번째로 건설된 도시 스텔렌보스는 비옥한 농경지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그 주변에 팔과 프랑쉬후크, 서머셋웨스트, 웨링턴 지역을 통틀어 와인랜드라고 한다. 1688년 프랑스에서 쫓겨난 위그노파 신교도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유럽과는 다른 비옥한 땅과 커다란 일교차는 유럽과는 다른 남아공만의 와인을 생산하는 비결이 되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는 높은 명성을 지니고 해외에도 수출된다. 남아공 인근의 남아프리카 나라들의 소비되는 와인 대부분은 여기에서 생산된 것들이다.
긴 설명을 간단히^^ 듣고 이제 와인을 시음할 차례이다. 이것저것 시음 중 독특한 것을 발견한다. 안주로 치즈나 스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초콜릿을 주고 있다. '어! 이것도 안주가 되나..... 그런데 초콜릿은 생각보다 와인과 잘 어울리는 안주였다. 문득 대학 다닐 때 초콜릿에 소주를 먹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생각보다 소주와 잘 어울려 깜짝 놀랐었다^^
한참을 와이너리에서 놀고 다시 투어 버스를 탄다. 벌건 대낮에 와인을 여러 잔 마셨으니 취기가 오른다. 술은 낮술이라고 했나..... 한 것 오른 취기에 병훈과 눈치 없이 낄낄대며 떠들다 보니 후트베이(Hout Bay)에 도착한다. 후트베이는 예전에 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후트는 네덜란드어로 나무라는 뜻이다. 걷다 보니 해산물 식당이 많이 보여, 점심을 먹기로 한다.
사람은 많고 가격도 적당해 보였으나 결론은 실패다. 튀김에 기름이 너무 많았다. 튀김 기름을 언제 교체했는지도 모르겠고, 같이 시킨 맥주 아니었으며 안 먹고 그냥 나올 뻔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오다가 깜짝 놀란다.
커다란 물개 한 마리가 바다에서 어슬렁거리며 도로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보니 처음도 아닌 듯 사람들 옆으로 다니며 친한 척을 한다. 먹이를 달라는 신호인 듯한데, 먹이를 주지 않자 데굴데굴 굴러 다닌다. 그럼 이 녀석은 노숙자 물개인가^^ 잘 얻어먹어서 그런지 몸집도 엄청나게 크다. 물어보니 후트베이 앞바다 섬에 물개들이 산다고 한다. 그런데 딱 몇 녀석은 이렇게 수시로 항구로 올라와 지나가는 사람들 삥을 뜯는다고 한다ㅎㅎ
후트베이를 지나 언덕을 넘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풍광이 열리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세계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라는 채프먼스 피크 드라이브 해안도로를 달린다. 해안선을 절벽을 따라 둥글게 돌아가나는 아찔한 체험과, 옆에서 바위를 깎아 들어간 반터널식 도로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준다.
캠프스베이 하얀 모래뒤로 여러 개의 봉우리가 보인다. 높은 바위산 12개가 있는데, 예수의 열두 제자에 빗대어 12 사도 봉우리라고 부른다. 어떤 제자는 얼굴이 뽀족하고, 다른 제자는 둥글고,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며 하나 둘씩 하얀색 카페에 불이 들어 오며 푸른 하늘과 만나자, 12사도 봉우리는 액자 속으로 들어간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다음날 희망봉을 가려고 차를 렌트한다. 차를 빌려 처음 운전대를 잡으며 살짝 긴장한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에 운전석이 있는 차는 거의 이십 년 만에 운전하는 것 같다. 앉아 있는 위치도 어색하고 방향 지시등을 켜면 위도우 브러시가 움직인다^^ 조금씩 적응하며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희망봉!
이름 만들어도 설레는 말이다. 어린 시절 지도 보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볼 때마다 거기 가면 모든 희망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세계여행가 김찬삼 교수의 희망봉 사진을 보면서 꼭 가고 싶었다. 김찬삼 교수가 그 엄혹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자신은 피부가 하얘서 백인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갈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 희망봉을 지금 가고 있는 것이다.
희망봉 자연보호구를 거쳐 희망봉으로 향한다. 희망봉 보호구(Cape of Good Hof Nature Reserve)는 케이프 반도 남단 시몬스타운과 희망봉사이에 자리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구의 하나이다. 이 보호구는 서쪽부터 희망봉곶, 매틀리어 곶(Cape Maclear), 포인트곶의 3대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희망봉 자연보호구에는 진귀한 동식물이 많이 서식하는데, 그중 적잖은 동식물은 원시적 진화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생태 연구의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1836년 다윈도 이곳에 와서 식물자원과 종의 기원 및 진화과정을 연구한 바 있다.
그리고 보호구의 해변가에는 포르투갈 항해가 바르돌로 뮤 디아스의 기념비와 인도항로의 개척자인 포루투갈 항해가 바스코 다가마의 기념비가 서 있다.
바르돌로뮤 디아스는 포르투갈 엔리케 탐험대에 소속된 범선 3척을 이끌고 1488년 이곳에 도착한다. 그는 늘 바람이 세고 파도가 높게 일어나는 이곳을 폭풍우의 곶이라고 명명했다. 그의 보고를 들은 국왕 주앙 3세는 앞으로 자주 오갈 이름치고는 흉하다며, 희망을 줄 뿐 아니라 듣기에도 좋은 '희망봉'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라고 명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관용되고 있다. 디아스는 1500년 다시 한번 희망봉까지 항해에 나섰다가 폭풍우를 만나 목숨을 잃고 만다.
희망봉은 영어로는 Cape of Good Hope로 직역하면 아름다운 희망의 곶이라는 뜻이다. 지리적 위치는 동경 18도 25분 26초, 남위 34도 21분 25초이며, 케이프 타운 남방 5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희망봉은 대서양과 인도양의 접하지로서,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기 전 300년 동안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유일한 해상통로였다. 수에즈운하 개통 이후 항로로서의 역할이 조금 약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25만 톤급 이상의 유조선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어 이곳을 지나야 만 한다. 해마다 3 - 4만 척의 대형선박이 희망봉을 거쳐간다. 유럽 수입원유의 30% , 전략물자의 70%, 식량의 25%가 이곳을 지나간다.
희망봉은 두바다가 만나는 지점으로 바람과 파도가 거세다
이곳은 폭풍우가 잦고 파도가 높아 발견 당시 폭풍우의 곶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살인적인 파도가 친다. 이 파도는 온화한 해류와 한냉 한 남극 해류가 이곳에서 맞부딪치기 때문이다. 늘 사나운 바람이 불고 높은 파도가 치며 심지어 파고가 30m에 이를 때도 있다.
희망봉 위쪽 언덕 케이프포인트(Cape Point) 정상에는 1860년 설치한 등대가 관광객을 맞이한다. 정말 더 이상 갈 수 없는 땅끝이다. 포르투갈 국민시인 카몽이스(Luis Vaz de Camoes 1524 - 1580)는 포르투갈 서쪽 끝 카보 다 로카(로카 곶)에서 '여기 땅이 끝나는 곳에 바다가 시작된다'라고 외쳤다. 인도로 가기 위해 희망봉으로 출항하는 포르투갈 탐험선에 바쳤던 카몽이스의 헌시는, 희망봉에 대한 헌시이기도 했다.
전망대에는 남극 6248kn, 뉴욕 12541km, 런던 9623, 뉴델리 9296km 등 전세게 주요 도시가 표시된 방향과 표지를 배경으로 여행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아쉬게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도시 서울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희망봉에는 아직 한류가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다음에는 서울 표지판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여기는 희망봉이니까^^
희망봉 등대로 알려진 이곳은 지금은 등대역할을 하지 않는 퇴역등대이다. 아래쪽 바다에 더 가까운 곳 디아스포인트(Dias Point 해발 87m)에 1919년 새로 설치된 등대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등대가 자주 구름과 안개에 가리는 문제'가 있어 새로운 등대를 설치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희망봉은 특정지점이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케이프 반도 전체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이 희망봉은 우리 역사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904년 러일전쟁의 승패를 갈라 놓은 것이 바로 희망봉이다. 러일전쟁이 터지자 북유럽에 발트해에 있던 러시아 최정예 발트함대는 영국의 방해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무려 7개월이나 걸려 희망봉을 돌아 대한 해협에 도착한다. 그 사이 뤼순은 일본에 함락되었고 긴 항해로 지칠 대로 지친 발트함대는 동해에서 일본해군에 궤멸적 타격을 입게 된다. 이 전쟁의 결과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고, 러시아는 1905년 1차 혁명에 이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차르체제가 무너지게 된다.
케이프 반도 전경
희망봉은 영화 (캐러비안 해적 2 - 망자의 함)의 무대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해적들은 '플라잉 더치맨이다'라는 외침에 혼비백산한다. 바다의 무법자 해적들도 들려워했던 플라잉 더치맨. 인도양으로 항해하던 선원들이 희망봉을 돌아가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플라잉 더치맨이다. 플라잉 더치맨(Flying Dutchman)이란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 또는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이라는 뜻으로 유령선의 대명사이다. 플라잉 더치맨 전설의 무대가 바로 희망봉이다. 불쌍한 플라잉 더치맨이 희망봉 앞바다에서 영원히 헤매야 하는 것은, 코이코이산 원주민을 내쫓고 아프리카 땅을 식민지로 만든 원죄 때문이다.
처음 희망봉을 발견한 디아스가 1500년 다시 항해에 나섰다가 폭풍우로 죽은 곳도 이곳 희망봉 앞바다이고, 1641년 동인도에서 네덜란드로 돌아가던 반 데르 테켄 선장 (프랑잉 더치맨의 주인공)의 배가 폭풍우를 만나 침몰한 것도 희망봉이다. 그래선지 희망봉은 카몸이스부터 허먼 멜빌에 이르기 까지 시대를 뛰어넘어 전설과 문학의 소재가 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