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중부를 가다 - 3편 고아

이정****
202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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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피를 떠나 고아로 이동한다. 차로 5시간의 거리, 인도에서는 거의 옆동네 라고 해도 될듯하다^^ 고아는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로 꼽히는 곳이다. 끝없이 계속되는 해안, 무성한 야자수 군락, 강렬한 태양과 아라비아 수평선이 춤추듯이 넘실대는 붉은 석양 등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도의 보석' 이라고 불릴 정도로 여행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인도이며 인도가 아닌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아는 단순히 휴양지가 아니다. 고아는 인도에서 포르투갈과 관련되어 아주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아라비아해로 똘어지는 고아의 석양

16세기는 세계역사의 지각변동을 가져온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명하다. 콜럼부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항로를 발견한 이후, 수 많은 이들이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찾기 위해 바다로 바다로 향한다. 마침내 1498년 포루투갈의 장교 바스코 다가마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한다. 아리비아를 거쳐 인도 서남 해안 캘리커트에 도달한 것이다. 

성프란시스 성당에 있는 항해도. 쿨럼부스, 바스코다가마, 마젤란 등의 항해도가 그려져 있다.

사실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찾게 된 이유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럼 왜 기를 쓰고 인도를 가려했을까? 그것은 향신료 때문이다. 15,6세기 향신료의 가치는 말그대로 금값이다. 후추는 같은 무게의 금과 교환되었고, 넛맥이라고 불리는 육두구 500g은 여자노예 3명 혹은 소 7마리와 교환되어 금보다도 휠씬 비쌌다. 문제는 이 동방과의 향신료 무역을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제국이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항로를 통해 인도로 가려는 시도가 줄을 잇는다. 결국 이 노력은 바스코 다가마에 의해 결실을 맺게 된다. 멀리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커타에 도착한 바스코 다가마는 가지고 간 모든 것들을 향신료로 바꾸어 배에 싣른다. 그리도 다시 희망봉을 돌아 도착했을 때, 그는 들어간 총비용의 600 배를 이익으로 남긴다. 이후 모든 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바다로 바다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바스코 다가마가 돌아온 이후 포르투갈은 1503년 코친에 첫 항구를 개설하면서 본격적인 향신료 무역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2대 총독 알브케르케는 상업적인 이익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1510년 고아를 무력으로 점령한다. 더 나아가 1530년에는 고아를 포르투갈 인도의 공식적인 수도로 삼기에 이른다. 고아는 인도 포르투갈의 해상무역의 최고 전진 기지로 인도 서해안의 향신료 무역을 독점해 고아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올드 고아 지저스 대성당. 부패하지 않는 성프란시스 사비에르의 시신이 모셔져 있다

올드 고아는 본국의 수도 리스본을 본따서 만들었다. 포르투갈의 국민시인 카몽스는 올드고아를 동바의 귀부인이라고 찬양할 정도로 올드 고아는 전성기를 맞이 한다. 그러나 고아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본국 포르투갈이 새롭게 등장한 해양세력 네덜란드, 영국에 눌리며 2등 국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본국의 쇠퇴로 고아의 영향력도 감소하기 시작했고 1843년에 찾아온 대대적인 전염병은 올드 고아를 완전히 붕괴시킨다. 결국 고아의 수도를 빠나지로 옮겨 버린다. 고아는 1961년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여 연합영토로 남아있다가 1987년 인도로 편입된다. 기나긴 식민지배의 종식이었다. 물론 포르투칼이 순순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독립 후 반환 요구를 거절하자 인도는 무력을 동원해 고아를 침공한다. 당시 포르투칼 의 수비대는 4000명정도 였다. 인도는 40,000명의 군대를 통원하여 고아를 공격한다. 무력에서 당할 수 없었던 포르투칼은 국제 사법재판소에 제소를 하고 나토를 비롯한 서구열강에 호소하며 고아를 사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실효적 지배를 달성한 인도가 이에 응할리는 없다. 결국 포르투칼에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며 권위주의 정권이 물런난 이후에야 공식적으로 고아를 포기하게 된다.  

고아에 있는 바스코 다가마의 문. 바스코다가마의 손자가 세운 것이다.

  고아에 포르투갈이 식민지를 개설한 이후 고아는 동방세계의 기독교 중심지였다. 초창기에는 현지의 관습을 존중하며 힌두 사원들도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1540년 이후 식민지 정부의 명확한 기독교 개종정책이 시행되면서 많은 힌두 사원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포르투갈 양식의 교회와 성당이 세워졌다. 또한 포르투갈 여성들과 원주민의 결혼을 통해 포르투갈 혈동을 가진 주민을 양성하여 원주민들에게 가톨릭 문화를 주입시키려 하였다. 이 방식은 대단히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고아에 의도치 않은 다른 변화를 몰고 온다. 무엇보다도 고아에 살던 포르투갈 여성들은 원주민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이끌어 낸다. 그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결혼한 여성에게 부부재산의 50%를 보장해 주는 재산법이 법율로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아의 여성들은 다른 인도 지역에 비해 법률적으로 상당히 혁신적인 지위와 권리를 누리게 된다.  영국의 철저한 분리정책이 인도 민족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면, 포르투갈의 동화정책은 독특한 인도문화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물론 자극 문화의 우월성에 에 기인한 정책으로  제국주의적 시각을 크게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고아는 가톨릭의 배타성, 힌두의 수용성이 결합된 독특한 인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 되었다.

안주나 비치 벼룩시장

고아는 인도의 대표적인 휴양지이다. 인도양을 끼고 있어 연중 온화한 기후와 포르투칼의 다양한 유적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 주는 곳이다. 안주나 비치로 행한다. 고야에서 재일 유명한 벼륙시장이 있는 곳이다.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기념품이나 문물들이 보인다. 전체 인구의 25%정도가 기독교도이고 나머지는 힌두, 이슬람이다. 고아는 자유분방한 서구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서양의 히피문화 영향이 커 보인다. 1960,70년 서양에서 인도의 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하며 서양의 히피들이 고아로 몰려든다. 마리화나와 기타로 무장^^ 한 그들은 단숨에 고아를 점령한다. 고아 주정부의 입장에서 인도의 문화에 관심이 있다는 것과 돈벌이 수단이 된다는 것이 맞물리며 히피들은 어렵지 않게 고아에 자리를 잡게 된다. 히피들이 자기들이 쓰던 물건 한두개씩 들고나와 재미삼아 영업하던 벼룩시장이 이제는 전문적인 상인들이 80% 이상을 차지하는 초대형 장터로 변모하였다. 고아는 수많은 해변을 가지고 있다. 어디든 상관없다. 겨울이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로 우기는 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고아는 아름다운 해변, 독특한 문화 맛있는 음식까지 두루 갖추어진 여행지이다.  

인도의 국민맥주 킹피셔

숙소로 돌아와 킹피셔를 한잔 한다. 고아는 다른 인도의 다른 주에 비해 술값이 엄청 싸다. 주세가 아주 싸기 때문이다. 번듯한 가계에서 포트 와인 한병시켜도 만원이면 먹을 수 있다. 주세가 2천원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히피들의 천국은 다 이유가 있다^^ 우리같은 술 좋아하는 중년의 여행자들에게는 더 더욱 매력적인여행지이다. 

델리에 있는 암베드카르 동상

인도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스트 제도이다. 카스트는 기원전 1500년전 아리안인들이 들어오면서 원주민인 드라비다인을 차별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신분제도이다. 표면적으로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네 계급으로 구성되며 이외에 하리쟌이라 불리는 불가촉천민이 있는 정도로 알고 있다. 그리고 1949년 인도가 독립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카스트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카스트는 특정 카스트는 특정직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자띠가 있으며 3천종의 직업이 이에 해당된다. 물론 IT 처럼 새로 생겨나는 직업이 이에 속하지 않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인도의 직업은 이에 해당된다. 이 자띠에 의해서 힌두교도가 아닌 불교도나 이슬람교도도 카스트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몇가지로 정리해 보자. 첫째 인도의 많은 가정에서는 같은 카스트내의 결혼을 선호한다. 다른 카스트라도 한 단계 정도이 차이만 인정하려고 한다. 둘째 특정 카스트는 특정 직업군에 집중되며 이 자띠에 의해 무슬림이나 불교도도 카스트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이 직업은 대대로 이러지며, 이름과 성 또한 이 자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셋째 정당들은 카스트별 지지기반을 고려해 후보를 선정하기 때문에 선출되는 정치인들도 카스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넷째 현재도 카스트에 따른 분리가 존재한다. 특히 농촌지역에서는 관혼상제 뿐 아니라 식사 같은 일상생활에서도 카스트에 따른 엄격한 분리가 존재한다. 초대 법무부 장관이었던 암베드카르 조차 자신이 식사 초대를 받으면 접시를 쓰지 말고 나뭇잎을 쓰라고 주문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불가촉 천민인 자신이 사용한 접시는 다 버리기 때문에 접시를 쓰지 말라고 한 것이다.

현대 인도에서 카스트와 맞선 싸운 인물로는 이 암베드카르를 빼놓을 수 없다. 불가촉 천민출신인 그는 부유한 부모, 친척덕에 대학교육을 받고 영국 유학까지 다녀오게 된다. 암베트카르는 파란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같다고 외치며 파란옷을 입고 다녔으며 1950년 제헌의회 헌법에서 카스트 철폐가 명문화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계속된 암베드카르의 노력은 입학과 취업에서 불가촉 천민을 비롯한 저소득층에 지원을 강화하는 지정카스트 퀴터(OBC 쿼터)를 만드는 것으로 일정 정도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쿼터의 혜택의 받지 못하는 수드라의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수드라를 포함하는 전국민의 40%가 이 혜택을 받는 것으로 개정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OBC 쿼터가 역차별이라 주장하는 상위 카스트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브라만이 분신하며 항의하는 사태에 이르른다.
결국 현재 인도에서 카스트는 법적으로는 사라졌다고는 하나 빈부격차의 문제와 맞물리면서, 정치인들에게 이용되며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50년 된 나무

올드고아로 향한다. 구시가지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 두그루가 보인다. 얼마나 된 것이내고 물어보니 150년 된 마무란다. 에게! 그런데 왜 이렇게 큰 거지? 인도는 아열대 지방이다. 나무는 1년 내내 자란다. 수치적으로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 보다 두배는 빨리 자라는 듯 하다. 

세성당 1619년 지어진 아시아에서 제일 큰 성당

올드고어는 빠나지의 동쪽으로 9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포르투갈 식민지의 옛 수도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은 이곳에 우아한 왕궁과 저택, 화려한 성당을 세웠고, 18세기 중반에 전염병으로 수도가 빠나지로 이전될 때까지는 ‘동방의 로마’로 불리며 발전해 왔다. 현재는 몇 개의 성당만이 남아 있지만 16세기 해양 왕국이었던 포르투갈의 역사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시선을 사로잡는 높이 76m, 너비 55m의 쎄 성당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1619년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도금된 제단에는 성 캐서린의 삶을 묘사한 6개의 패널이 있다. 번개를 맞아 한쪽 탑이 무너져 내려 현재도 복원중이다. 고고학 박물관(Archaeological Museum)을 지나 등장하는 아씨시 성 프란시스 성당(Church of St. Francis of Assisi)은 올드 고아의 중요한 성당 중 하나이다.
제단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네 명의 전도사, 성 프란시스,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성당 뒤쪽에 있는 성 캐서린 예배당(The Chapel of St. Catherine)은 1510년 고아를 점령한 포르투갈의 탐험가 알부케르케(Albuquerque)를 위해 지어졌다.

소고기 요리. 몰소고기로 매우 질기다.

눈치가 있으면 절에서도 고기를 얻어 먹는다고 가이드를 잘 만나니 인도에서 소고기도 먹어 본다. 그동안 다양한 인도 커리와 음식을 먹었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잘 안 먹으니 어디가나 닭만 보인다. 그것도 맛있는 닭껍질은 다 벗겨 버리고 살코기만 준다. 그런데 드디어 인도에서 소고기를 먹기로 한다. 한껏 부푼 마음으로 식당으로 행한다. 식당 분위기도 좋고 외국인도 내국인도 많다. 드디어 나온 소고기. 엄청 길긴데다가 맛도 별로 없다. 너무 기대가 컷나.... 물어보니 물소 고기이고 대부분의 소고기는 매우 질기다고 한다. 하긴 길거리를 누비면서 그리 운동을 많이 한 소들이니 얼마나 근육질일까?  그냥 인도에서 소고기를 먹어 봤다는 것으로 만족해본다. 고아를 끝으로 이번 인도 중부여행을 마무리 한다. 겨울이라 그리 덥지 않은 날씨에 쾌적하게 돌아 다닌 것 같다. 이제 인도 여행을 시작했으니 갈 곳이 천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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